점심을 먹는 것으로 공식 일정은 끝났다. 점심을 주다니. 약간 감동받는 척을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좋을 시각까지 10시간 정도 있었다.
난 두 군데를 갔으면 했다. 하나는 식물원(植物園; Singapore Botanic Gardens)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수변정원(濱海灣花園; Gardens by the Bay)이었다. 전자는 내가 궁금한 곳, 후자는 다른 이들이 칭찬하는 곳이었다.
식물원은 오차드街에서 가까울 것으로 생각하고 걷기 시작했다, 실제 지도에서도 그리 멀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하나의 변수를 계산에 넣지 못 했다는 것을 식물원 정문에 도착할 때 알게 되었다. ‘날씨’. 햇살은 미친 듯 따가웠고, 공기는 숨 막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젖어버렸다.
식물원은 우리의 국립수목원같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식물들을 길러내고 배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연구시설까지 있는 것 같았다. 멍하게 땀을 닦던 그 그늘 넘어 실내는 어떤 실험실이었다. 햐안까운의 한 여인과 창문 넘어 눈이 마주칠 때까지 신기한 듯 들여다 보았다.
식물원은 훌륭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른 아침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있고 싶었다. 國立蘭園 National Ochid Garden은 5불이나 지불하고 들어간 만큼의 의미는 없었지만 우리네 온실의 반대개념인 냉실, Cool House는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더워 쓰러지기 직전인 나를 구해줬다.
이 도시의 더위는 나만 적응을 못 하는 느낌이었다. 젖은 옷에 연신 땀을 닦으며 걷는 사람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 뿐이었다.
드넓은 벌판과 나무들 사이에 발견한 작은 호수에 즐거워 하다가 뱀인지 도마뱀인지 뭔지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랬다. 많이 놀랬다. 내 쪽으로 와서 더 놀랬다. 거의 소리쳤다. 그 뒤 물 근처로는 걷지 않았고 바닥을 살피며 움직였다. 어린 시절 가장 무서워 했던 동물이 그런 종류였다는 것을 순간 알게 되었다.
(다시 적게 되지만) 식물원은 훌륭했다.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 안에서 보내고 싶었다.
몇 시간을 식물원에서 즐거이 보낸 후, MRT를 타고 수변정원으로 갔다. 잠시 잘 못 생각한 나머지 다른 역에서 내리게 된 난, 공사장을 가로질러 목적지로 걸어갔다. 이 도시는 예전과 다름없이 쉼없는 공사가 계속되는 듯 했다. 새로이 땅을 만들고, 그 땅에 새로운 건물을 올렸고, 길도 새로 뚫었다. 짧은 역사이지만 보존해야 할 곳은 잘 보존되고 있는 - 성장하는 유기체 같은 느낌과 많은 시간을 걸쳐 역사를 기록한 고목같은 느낌이 교차하는 도시이다. 그래서 난 이 도시가 좋은 가 보다.
그렇지 않아도 몇 번의 교통사고 탓으로 좋지 않은 무릎이 시큰 거리는데, 계획보다 너무 많이 걷게 되었다. 서늘한 바다 바람으로 젖었던 옷이 마르면서 한기도 느껴졌다. ‘밥이나 챙겨먹고 공항에 가서 쉴까?’ 생각을 열 걸음을 옮길 때 마다 한 번씩 하게 되었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은 수변정원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이 도시 사람들은 식물을 가지고 꾸며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인공구조물, Big Tree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풍경. 작은 하천과 풍부한 수풀은 식물원에서 느꼈던 자연에 가까운 평온과는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인공미가 가득 가득 담겨있는 정원형식의 이 곳은 잘 다듬어진 장인의 공예품을 모방한 공산품 같았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같은 것은 없을껄? 이라고 말하는 듯 한 독창성이 자연에서의 가져다온 풍경으로 잘 스며들었다.
식물원은 하루를 같이 보내고 싶은 곳이라면, 수변정원은 시간 있을 때 가벼운 산책 정도 하면 좋을 곳이었다. 그리고, 인공구조물로 만든 곳인 만큼 편의시설도 많았고, 가격의 편차가 다양한 음식점도 있었다.
큰나무, Big Tree가 이곳의 랜드마크인데, 5불씩이나 주고 올라가 볼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다가 결국 올라가게 되었다. 가장 큰 나무 위에는 음식점도 있어 보였고, 여러 큰 나무들 사이를 타원을 그리며 연결하여 관람대를 만들어 두었다. 적당히 높은 곳이라 적당한 공포를 느낄만 했고, 더군다나 관람대 아래에는 사물이 비쳐 보일만큼 촘촘한 구멍이 - 강한 철사로 엮은 - 높이가 주는 느낌을 배가 시켰다.
가볍고 가는 구조물에 얇은 와이어로 연결된 큰 나무들과 관람대를 보자니, 학생 때 머리 아파했던 구조역학 생각이 절로 났다. 설계자가 존경스러웠다.
MRT를 타고 오차드가로 와서 짐을 찾고, 택시를 잡아 타고 공항으로 갔다. 영어보다 중국어에 익숙해 보이는 공항직원이 긴 시간을 나에게서 빼앗았지만 괜찮았다. 뭔가 잘 못 되었는지 동료를 여러 번 부르고 내가 알아 듣지 못 하는 언어로 이야기를 하며 뭔가를 입력하고 조회하는 듯 했다. 난 참을성 있게 딴청을 피우며 그 직원의 집중을 방치했다.
몇시간 공항을 둘러보고 의자에 앉아 졸다가 귀국편 항공기에 올랐다. 자리번호는 12번. 12번? 이코노미석이 아니라는 이야기. 의자를 눞혀 침대를 만들 수도 있고 부담스러운 승무원들의 과잉친절을 온 몸으로 이겨내야 하는 자리이다. 12번이 적혀있는 탑승권이 내 손에 있는 연유는 모르겠지만, 호사를 누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 슬쩍 즐거워 했다.
책을 한 권 집어들고 읽다가 오고가는 승무원의 영혼없는 친절이 그칠 무렵 담요를 덮고 잤다. 이코노미든 여기든 긴 시간 비행기를 타는 일은 몹시 불편한 일이다.
승무원들의 과잉친절을 겪으며 부담스럽다는 생각에서 - 불편하다는 생각을 거쳐 - 성가시다는 생각으로 옮겨갔다. 어떤 자들은 대우받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씨 안 좋은 사람은 가학적으로 변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라면사건도 이렇게 시작되었을까?
오래 전에 경험한 두 외국국적기 승무원과의 일이 생각났다. 나이 많아 보이는 한 승무원과는 마치 이모와 조카같은 대화를 하고 그녀가 쉬는 시간에 같이 음료를 마시고 채스를 두며 앞으로의 나의 일정에 값진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나와 동년배로 보이던 다른 항공편의 승무원은 처음 입국신고서와 마주했던 나에게 친구처럼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콜라'라고 하는 음료를 그들은 '코크'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멋진 미소와 함께.
친절은 어떻게 배푸는 것인지 설명할 만큼 그 주제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번 경험처럼 마치 주종의 관계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면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항공사에 건의를 할까? 생각만 하다가 말았다. 난 그들의 비즈니스가 잘 되든 말든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짧은 싱가포르와의 시간은 쉽게 지나갔다. 여유가 없었던 시간, 나 스스로도 설득되지 못 했던 이야기들, 낯선 사람들, 귓가에 맴돌기만 하던 대화, 나의 상태는 도시의 열정적인 분위기와 유리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에 미안함을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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